
독립기념관 차리석 독립운동가 회갑기념 사진 - 약산소식지 허예주 기자
차리석 독립운동가 후손 차용조 선생님이 김용만 국회의원 방송에 나와서 한 말이 가슴에 남는다. ‘아버지가 광복 24일 만에 돌아가셔서 다행이다.’라는 말에 필자도 공감한다.
출처: 김용만 의원 유튜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고 속담은 말하지만, 독립운동가는 해방 후 삶이 일제강점기보다 더 잔혹했다. 해방 후에 독립운동가가 겪은 비극적 삶을 생각하면, 해방 전 돌아가신 독립운동가 삶이 더 나아 보이기까지 한다.
아들 차영조 선생님은 해방 후 어지러운 정국에서 독립운동가 아들로 좋지 못한 일을 당할수도 있다는 우려에 어머니가 성을 바꿔 신영조가 되었다. 해방 후 어렵게 아들을 키운 차리석 선생님 부인 홍매영 독립운동가는 뒤늦게 2018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차리석 독립운동가를 한국 사람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질문하고 싶다.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이나 효창공원 의열사에 다녀왔다면 차리석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영상에서 이야기하지만, 차리석 선생님은 해방 후 귀국 전 임정의 서류를 정리하는 임무를 맡을 정도로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독립운동도 활발히 하신 분이다.
동암 차리석 독립운동가의 첫 구속은 신민회 사건 때문이다. 서북 지방의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와 기독교계 민족 지도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해 105명의 애국지사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이 때 차리석 선생님은 수년간 옥고를 치르고 1913년 3월 20일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1919년 3·1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한 뒤, 상해(上海)로 망명했다고 한다. 같은 해 독립신문 기자로, 1921년에는 독립신문 사장으로 신문 발행일을 했다.
1922년에는 임시의정원 평안도 선출 의원이 되어 정치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1930년에 개최된 의정원회의에서 의장에 석오 이동녕이 피선되고 차리석 선생님은 부의장에 피선되어 활동했다. 1933년 12월까지 의정원의원으로 재직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임시의정원은 1919년 상해에서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법 기관이다. 1919년 만들어진 임시정부는 삼권분립을 이미 실시하고 있었고 자체 헌법도 제정했다. 9월 11일 발표된 「대한민국임시헌법」 제5조에는 “대한민국의 입법권은 의정원이, 행정권은 국무원이, 사법권은 법원이 행사한다”라고 규정되었다고 한다.
1932년 11월 28일 개최된 의정원 회의에서 차리석 선생님은 백범 김구, 석오 이동녕, 청사 조성환, 해공 신익희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임명되어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국무위원 또는 국무위원회 비서장으로 임시정부와 운명을 함께 하였다고 한다.
1935년 임시정부가 분당 싸움이 거듭되고 국무위원들도 사퇴하였을 때도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여러 사람을 설득하는 등 명맥을 유지키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35년 11월 13일 위기를 극복하고 임시정부를 사수하여 국무위원 취임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이때 주석이 된 분이 석오 이동녕 독립운동가이다.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고, 마지막에 귀국할 때 가져갈 필요한 서류를 정리하다 과로로 순국하셨다고 한다. 한국인이 임시정부를 이야기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인물 중 한 분이다.
다행히 김구 선생님이 유해를 모셔 와 효창공원 의열사에 계시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고국에 계신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다만 효창공원이 원래 목적대로 독립운동가를 모시는 장소가 되길 바랄 뿐이다. 돌아가신 분이 옆에 경기장을 만든 생각을 한 이는 독립운동가를 존경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 뿐이다.
효창공원 수난사
차리석 독립운동가
https://www.minjok.or.kr/archives/101242
독립신문과 관동대지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