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6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다시 전쟁이 발발할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후 1597년 1월 10일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도해하여 조선으로 들어오자,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당시 통제사였던 충무공 이순신은 제2차 백의종군이라는 고초를 겪었다.
충무공이 제2차 백의종군을 겪은 사건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조선 수군을 재건한 과정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서, 이를 다룬 연구 자료가 적지 않다. 또한 인터넷에서도 이와 관련한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본 글은 새삼스럽게 충무공의 제2차 백의종군 사건이나 그 이후 과정을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이와 관련한 사료를 살펴보면서 그동안 간과되어왔던 내용을 찾아내어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1597년 1월 10일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으로 들어온 뒤 이 일이 조선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충무공을 처벌하려는 논의가 벌어졌다. 다음은 『선조실록』의 해당 기록에서 주요 내용을 옮긴 것이다.
『선조실록』 권84, 선조30년(1597년) 1월 27일 무오 3번째 기사
윤두수가 아뢰기를, "... 위급할 때 장수를 바꾸는 것은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시켜야 할 듯합니다."라고 하니, 정탁이 아뢰기를,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만 위급할 때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니, 상(선조)이 이르기를, "... 그런 사람은 비록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조정은 1597년 1월 27일 충무공의 책임에 관한 논의를 벌였지만, 이날은 그에 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날 1월 28일에 이르러 선조는 원균을 경상우수사 겸통제사로 임명하는 명을 내렸다.
『선조실록』 권84, 선조30년(1597년) 1월 28일 기미 2번째 기사
(선조가) 비망기로 (좌부승지) 유영순에게 전하였다.
"... 나는 평소 경(원균)의 충용을 알고 있어 이제 경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경상도통제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 兼慶尙道統制使)로 제수하니, 경은 더욱 책려하여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라. 우선 이순신과 합심하여 전의 유감을 깨끗이 씻고 바다의 원수를 다 섬멸해 나라를 구하여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훈공이 종정(鍾鼎)에 새겨지게 하라. 경은 공경히 하라. 이를 원균이 있는 곳에 하유하라."
위 『선조실록』 기사는, 선조가 원균을 경상우수사 겸통제사로 제수함과 함께 원균에게 충무공 이순신과 합심하라는 명을 내린 일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사의 내용을 통해 충무공이 전라좌수사 관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통제사 관직만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넘어갔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원균이 1597년 1월 28일에 경상우수사 겸통제사로 임명된 일은 또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응록, 『죽계일기』, 1597년 1월 28일
원균이 경상우수사 겸통제사에 제수되었다. (元均拜慶尙右水使兼統制使)
『죽계일기』는 선조 때 문신 조응록(趙應祿, 1538~1623)이 1592년부터 1615년까지 작성한 일기이다. 비록 『죽계일기』는 개인적인 기록이지만, 저자 조응록이 관리 생활을 하면서 조정에서 겪은 여러 가지 사건을 기록하였으므로 공적인 성격을 지닌 자료이기도 하다. 『죽계일기』에는 여러 문무 관리의 임명과 파직 등에 관한 기록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1597년 1월 원균의 경상우수사 겸통제사 임명 기록도 확인되는 것이다.

역사를 가정하여 논의하는 것이 큰 의미는 없겠지만, 충무공이 전라좌수사 관직만이라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면 아마 정유재란 시기 전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건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선조실록』 권85, 선조30년(1597년) 2월 4일 을축 1번째 기사
사헌부가 아뢰기를 "통제사 이순신은 《중략》 적을 토벌하지 않고 놓아두었으며 은혜를 저버리고 나라를 배반한 죄가 큽니다. 잡아 오라고 명하여 율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라고 하니,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조응록, 『죽계일기』, 1597년 2월 4일
사헌부가 이순신을 나국할 일을 아뢰니 비변사에 내려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조응록, 『죽계일기』, 1597년 2월 5일
비변사가, 이순신이 처음에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지 않은 것과 또한 (적의) 군량선을 막지 않은 것은 그 죄가 크므로 대간의 계문에 의거하여 나국하고 죄를 주는 것이 어떠한지를 아뢰었다.
위 기록들에 나타난 바와 같이, 1597년 2월에 들어서자 조정의 상황이 다시 바뀌어 충무공을 파직하고 처벌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갔다.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을 정확히 밝혀주는 자료는 찾기 어렵지만, 영의정 류성룡과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관리들이 이 일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류성룡의 저서 『징비록』에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있다.
『징비록』, 「체 수군통제사 이순신 하옥(逮水軍統制使李舜臣下獄)」
이순신을 처음 추천한 것은 나였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원균과 합세하여 이순신을 공격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비록 『징비록』은 류성룡의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반영된 자료이지만, 충무공이 백의종군을 겪게 된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위 『징비록』의 기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쨌든 결국 선조는 1597년 2월 6일 충무공을 잡아 오라는 명을 내리게 되고, 의금부 도사가 이를 시행하기 위해 2월 7일 한양에서 출발하였다.
『선조실록』 권85, 선조30년(1597년) 2월 6일 정묘 3번째 기사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전하였다. "이순신을 잡아 올 때 선전관에게 표신(標信)과 밀부(密符)를 주어 보내 잡아 오도록 하고,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 오도록 말하여 보내라. 또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고 있다면 잡아 오기에 온당하지 못하니, 전투가 끝난 틈에 잡아 올 것도 말하여 보내라."
조응록, 『죽계일기』, 1597년 2월 7일
의금부 도사 이결이 이순신을 나국하기 위하여 나갔다.
지금까지 살펴본 기록을 종합해보면, 충무공을 잡아 오기 전까지 벌어진 조정의 의사 결정 과정이 상당히 졸속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통제사 관직만 원균에게 넘겼다가 이를 다시 번복하여 전라좌수사 관직까지 파직시킨 점이 그러하다. 이런 식으로 조정의 의사 결정이 오락가락했다는 사실은 당시 국가 경영이 그리 매끄럽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1597년 2월 7일 의금부 도사가 충무공을 잡아 오기 위해 한산도로 출발한 뒤에 조정은 2월 9일 배설을 경상우수사로 임명하였다. 이는 아래와 같이 『죽계일기』 기록에 나타난다.
조응록, 『죽계일기』, 1597년 2월 9일
배설이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위 『죽계일기』 기록을 통해 원균의 관직이 경상우수사 겸통제사에서 전라좌수사 겸통제사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충무공이 전라좌수사에서 파직이 되면 그 자리가 공석이 되므로, 조정은 이 자리를 메우기 위해 경상우수사 겸통제사로 임명되었던 원균의 관직을 전라좌수사 겸통제사로 바꾸고, 배설을 경상우수사로 임명한 것이다. 「전라좌수사 선생안」에서도 원균이 1597년 2월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것이 확인된다.
충무공이 의금부 도사에게 잡혀가 의금부에 투옥된 날짜는 충무공의 조카 이분(李芬, 1566~1619)이 지은 「행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분, 「행록」
(1597년) 2월 26일 길을 나섰더니 온 길에 백성 남녀노소가 떼를 지어 둘러싸고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사또 어디를 가십니까? 우리는 이제 죽었습니다.”라고 하였다. 3월 4일 저녁에 옥문으로 들어갔다.
이분이 지은 「행록」은 『충무공가승』과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는 글로서 충무공의 일대기를 자세히 서술한 자료이다. 위 기록은 충무공이 잡혀간 날짜와 한양의 의금부에 투옥된 날짜를 명기하였다. 이 가운데 충무공이 투옥된 날짜는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조응록, 『죽계일기』, 1597년 3월 4일
이순신을 잡아 왔다(李舜臣 拿來).
「행록」과 『죽계일기』에 나타난 충무공의 의금부 투옥 날짜는 서로 정확히 일치한다. 이점을 고려하면, 「행록」에 나타난 충무공이 의금부 도사에게 잡혀간 날짜(2월 26일)도 정확한 기록일 가능성이 크다. 「행록」에는 충무공이 잡혀간 기록 바로 앞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주목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분, 「행록」
이때 공이 수군을 거느리고 가덕 바다로 갔다가 나국하라는 명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본진으로 돌아와 진에 있는 물건을 계산하여 원균에게 주었다. 군량미가 9,914섬인데, 밖에 있는 곡식은 계산하지 않았다. 화약이 4,000근, 총통이 각 배에 나누어 실은 수를 제외하고 300병이 있었으며, 다른 물건도 이처럼 계산하였다.
「행록」이 충무공의 조카 이분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자료이므로 위 기록에 나타난 군량미, 화약, 총통 등의 수량이 과연 신빙성이 있는지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량미, 화약, 총통 등과 같은 군사 관련 정보는 당시 관직에 있지 않던 이분이 알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관직을 인수인계하게 되면, 중기(重記)라는 자료를 작성한다. 중기는 '관아에서 보유한 금전과 물품의 수납 및 지출 등의 변동과 현황을 기록한 회계장부 또는 물품조사서'를 말한다. 충무공의 『난중일기』 1594년 4월 21일 기록에는, 충무공 휘하에서 방답첨사로 근무했던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이 충청수사로 임명된 뒤 중기를 수정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즉, 무의공 이순신은 충청수사가 된 뒤 방답첨사 업무를 인수인계하기 위한 문서인 중기를 작성한 것이다.
충무공은 통제사에서 파직되어 의금부 도사에게 잡혀갈 때 당연히 통제사 관직의 인수인계를 위해 중기를 작성하였을 것이다. 충무공이 의금부 감옥으로 잡혀가는 상황이었으니, 아마 그가 작성한 중기 원본이나 사본은 그의 아들 또는 조카 같은 인물이 보관하였다가 나중에 그 내용 일부가 「행록」에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국립중앙도서관, 『충무공가승』
이은상, 『국역 이충무공전서』, 1960, 충무공기념사업회
역주 신태영 외 4명, 『판본비교 징비록』, 2016, 논형
한국사총설DB, 조응록(趙應祿)의 『죽계일기(竹溪日記)』
박진철, 「조선 말기 ‘중기’ 자료를 통해 본 안동진과 그 속읍의 군비 실태」, 『한국민족문화』, 65, 2017,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